K: 김성우 큐레이터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A: 안진균 작가

K : 우리가 꽤 오래 서로의 작업을 살피며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운 좋게도 이번 전시《영원한 휴가》(2022, 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를 기회로 지난 작업을 거슬러 최근, 그리고 오늘의 사진에 대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처음 작가님의 작업을 보았을 때를 회상해 보면 기존 한국에서 발표되는 주요 사진 작업의 경향 아래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는 사진을 대하는 작가님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진 작업이 매우 매끄러운(fine) 표면, 그래서 차가운 이미지로 대변되는 세련된 형식과 함께, 이미지를 둘러싼 서사가 삭제된 채 납작한 표피의 이미지로 수렴되는 것이라면, 작가님의 작업은 다른 레이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작업은 사진을 통해 포착한 이미지의 조형적 미감보다는, 어색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직접 연출하고 그것을 둘러싼 고유의 아이디어를 읽어내야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형상의 미감을 ‘보기’보다는, 그 상황을 관통하는 내용을 ‘읽어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님이 사진을 마주하는 시각의 각도는 사진을 통한 피사체와 시공간의 압축적 ‘기록’에 있기보다는, 사진의 매체적 속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부터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작가님의 언급 “부모와 자식의 닮음을 사진의 재현성에 비유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로 압축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이를테면, 사진기를 매개로 형성되는 피사체와 촬영자의 위계와 같은 것들이겠지요. 

A : 제가 생긴 것부터 시작해서 걸음걸이 같은 기본적인 행동양식에서도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편입니다. 좋게 표현해서 특이한 거지 정상의 범주에서 미묘하게 벗어난 듯 보이는 거죠. 저는 진지하게 이야기 중인데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웃겨 보이는 상황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 반대로 진지한 상황에서 나 혼자 박장대소하는 경우도 있고요.

<Dance Dance Dance>에서 부모님이 사후에 본인들이 묻힐 장소에서 멋지게 차려입고 춤을 추는 장면을 연출하면 그 상황을 보는 저의 입장에서는 웃기겠다고 생각했지만, 함께 춤을 추는 저의 모습까지도 상황에 포함하여 그렇게 받아들여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발광적인 춤사위는 죽음의 절대성에 대한 냉소적인 몸부림이라고 생각했지, 슬랩스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거죠. 이는 단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비주류적 성향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보통’에서 살짝 빗긴 부조화에 대한 불안과 불편함이 저의 시각 저변에 짙게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조화롭지 못할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었고요.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그 구조를 분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초기 작업들이 플라톤의 동굴 구조에 집착했었던 것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Dance Dance Dance, 2006, Digital C-print, 50.8x50.8cm(x3)
K : 제가 느끼는 정서는 정확하게는 웃기지만, 슬랩스틱과 같은 것은 아니에요. 그보다는 오히려 냉소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Dance Dance Dance>(2006) 연작에서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춤을 추는 자식의 모습은 처음에는 웃기다가도, 어느 단계에 이르면 절규하는 광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요. 이러한 냉소는 작가님의 사진 연작 전반에 드리우는 정서라는 생각도 들어요. 또한 <Masquerade>(2006)에서 벽 뒤에 걸린 전형적인 가족사진, 그리고 언제나 양옆에 대열을 맞춰 위치하는 부모님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전형성을 거스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 그것을 찍는 자식의 모습이 나오는 TV 화면이나, 계속해서 여러 가면을 쓰고 촬영에 임하는 부모님의 모습은 보편적 가족사진의 전형으로부터 어긋난, 더 나아가 우리에게 고정된 이미지와 관습적 인식, 그 전형성에 대한 냉소로까지도 보입니다. 사실 사진이라는 매체는 그 구체적 형상의 사실적 기록이란 면에서 이미지의 속성과 그 전형성을 전면에 내세우기 용이하니까요. 다시 말해, 전형으로서의 이미지, 그리고 이미지를 통해 학습된 보편적 인식과 관념 등은 여기서 냉소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 같아요. 

A : 실제로 극단적으로 냉소적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강하고 권위와 체면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무척 좋아합니다. 소세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세상과 괴리되어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혹시나 인간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실망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피신 생활을 택한 것이겠죠. 하지만 그 피신 생활 속에서도 끊임없는 내적 갈등 속에서 방황합니다. 세상과의 불화를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저는 이 피신을 예술로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생활 속에서 불편할 정도로 냉소적인 만큼 그 반대로 예술의 체계에서는 한심할 정도로 비현실적이고자 했습니다. 예술은 현실의 이면이고, 꿈이자, 무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이죠.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죽음에 보내는 나의 비웃음이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여러 개의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통해 부모님의 얼굴이 실제로 희석된다는 믿음이 성립할 필요조건이니까요.

저에겐 이 어리석은 믿음을 담을 그릇으로 사진이 효과적입니다. 사진은 기만의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단순히 작은 입자들의 모임일 뿐인데, 우리는 그 모임이 만들어낸 2차원의 형상을 실재하는 3차원의 그것과 자동으로 연결합니다. 사진의 사실적 재현성이 뛰어난 만큼 사진 속의 꿈이 실재했다고 더욱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내가 방금 본 것이 실재가 아닌 사진임을 상기하는 순간(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사진 속의 진실한 믿음은 허무맹랑한 치기로 격하됩니다. 내가 예술의 체계에서 필사적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진실한 믿음 또한 냉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세키 소설의 등장인물들처럼 아무리 도망치더라도 현실 속의 내가 세상과의 불화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자조로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
Masquerade #1, #3, #4, 2006, Digital C-print, 50.8x50.8cm(x3)
K : 앞서 말씀하신 ‘플라톤의 동굴’에 대한 비유가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현상은 진실의 불완전한 표현들인 거죠. 우리가 보는 이미지란 실재의 불완전하고 혼동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의 비유와 같이 근본적인 질문에 다가서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 즉 ‘사진’은 가장 유효한 방법론일까요? 담아내려는 근원적 질문, 실재, 진실과 이데아는 어떻게 작가님의 사진 이미지에 담길 수 있는 것일까요? 

A : 사진기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저를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해줍니다. 플라톤의 동굴에 비유하자면, 동굴 안에 결박된 채 벽에 비친 그림자를 유일한 실재라고 믿는 죄수들의 위치에서 죄수들의 뒤로 이동해 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위치에 서는 것이죠. ‘관망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쉽고 완벽하게 재현이 가능한지 증명하면서 그것의 권위를 흔듭니다. 혹시 우리 또한 동굴 속의 죄수들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죠. 나의 신분만 위태로워질 뿐만 아니라 내 앞에서 나를 짓누르던 존재의 무게 또한 일순간에 줄여버리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냉소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어떤 진실도 담을 수 없습니다. 사진은 실패하기 위한 장치로서 유효한 거죠. <Dance Dance Dance>는 진실한 믿음을 사진에 담는척하는 것일 뿐 밑 빠진 독이란 것을 이미 알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사진은 오직 무효를 위해서 유효합니다. 사진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구조는 바로 이 무효의 구조입니다. 죄수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그동안 믿어왔던 모든 시각적인 것들은 무효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앞에 보이는 것을 그림자로 변환하는 순간, 즉 빛을 담아내는 사진기를 통해 눈앞의 것들을 그림자로 인식하게 하는 순간 그것을 무효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
Encave #1, #2, #3, 2010, Digital C-print, 101.6x151.4cm(x3)
K : 이 동굴의 구조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작업은 <Encave>(2010) 연작인 듯합니다. 하얀 천에 말 그대로 그림자가 맺히는 구조를 만들고 촬영을 진행했으니까요. 다만, 여기선 죄수에게 그림자를 보여주는 위치, 즉 사진가로서 관망을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사진가조차 죄수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거기엔 작가 자신, 그리고 사진 촬영에 동원되는 조명 등의 장비까지도 무대 안으로 들어와 버리니까요. 오히려 사진을 마주하는 관객들에게로 그 관망자의 시선, 권한을 넘겨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Encave>(2010) 연작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것은 부모님을 작가 자신의 그림자로서 상정하는 듯한 태도입니다. 작가의 뒷모습, 작가가 바라보는 부모님, 그리고 사진이 실시간으로 기록하여 하얀 천의 세트 위에 동시에 영사되는 부모님의 모습까지, 광학기기인 사진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로서의 그림자-부모님, 그리고 자식이 직접 마주하는 실재 그림자-부모님 등 매우 구조적으로 그 상황을 만들어 촬영하신 것 같습니다. 

A : 부모님의 빈 묏자리를 보며 <Encave>의 착상을 했습니다. 부모님이 당신들의 사후를 대비해서 마련한 빈 묏자리를 바라보던 저의 위치가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들의 자리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저는 자식으로서 빈터가 무덤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그 후 수십 년 동안 변화할 풍경을 반드시 바라보아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었고, 이를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만약 제가 이 죽음의 구조에서 한 발짝 물러나 그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허망한 예술의 차원에서라도 증명할 수 있다면 그 구속의 절대성에 흠집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만의 플라톤의 동굴을 건설했습니다. 스튜디오 공간 안에 천을 매달아 일시적인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직관적으로 동굴보다는 무대의 모습에 가까운데 이는 플라톤의 동굴이 은유적인 개념이고 한편으로 무대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을 소재로 사용해서 죄수들이 실재라고 믿던 동굴 속 환영의 가벼움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구축한 무대에서 제 부모님은 부모를, 저는 자식을 연기하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연출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닮은 동굴 속의 환영이 된 것입니다.

무대에서 ‘나’는 계속해서 부모의 환영을 실재라고 착각하고 그에게 절을 합니다. 절은 제의적인 의미보다는 세배처럼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규정하는 상징적인 행위로써 사용했습니다. 환영은 때로는 그림자로, 때로는 실시간으로 디지털 영사한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부모의 환영은 모여서 저를 만들기도 하고, 저의 환영과 함께하기도 하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부모가 모여서 저를 낳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세월이 흐르면 먼저 죽는 것처럼 말이죠. 동굴 안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환영을 연극적으로 은유하고, 환영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낱낱이 공개하며, 또한 우리가 만든 환영에 속아 넘어가는 모습을 연기합니다. 이 구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주체이자, 그 환영을 실재라고 착각하는 죄수이며, 그렇기에 환영 그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플라톤의 동굴 속 구성원들의 역할을 넘나들며 결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과시하고, 동굴 안의 허상과 동굴 밖의 실재를 뒤섞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음을 증명하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맞이해야 할 죽음을 미리 만들어 경험함으로 그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
Encave #13, #15, #14, 2010, Digital C-print, 101.6x151.4cm(x3)
K : 대상에 대한 문제도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사진으로 재현된 구체적 사실(혹은 사실적 재현)은 촬영된 피사체에서 시작합니다. 기록의 성격을 지닌 사진에 있어서 이미지의 중심에 서는 피사체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작가님의 작업에 있어서 초창기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그 대상이 작가님의 부모님을 매우 적극적으로 등장시킵니다.

A : 처음에는 부모와 자식 간의 흔한 갈등 때문에 부모님을 사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 부모님을 희화화했던 부분도 있었던 것 같고요. 이는 점차 나의 근원이자 나를 닮은 존재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빈 묏자리에서의 경험은 부모를 내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죽음의 이미지로 인식하도록 하였습니다. 부모라는 ‘실재’에서 부모의 ‘이미지’라는 허상으로 대상이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나의 작업에서 부모님은 오직 이미지의 차원에서 등장합니다. 본인들이 참여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이미지를 빌려준 것뿐입니다. 혹은 그들을 오직 이미지의 차원에서 대하는 나의 태도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내가 감사해야 할 이유도, 슬퍼해야 할 이유도 없는, 그저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태도 말입니다. <Three Faces Two Places One Device>에서 이 태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 블록을 대하듯이 부모의 이미지를 내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것으로 말입니다.

동시에 매체로서 사진의 역할과 속성, 즉 형식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가 작업의 대상이니 사진에 담으면 끝이라는 안일한 접근에서 벗어나 주제와 형식이 역동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의 대상과 나의 형식이 서로 유사한 성격을 공유한다는 발견에 다다랐습니다. 시각적인 차원에서 부모와 자식이 서로 닮음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사진의 체계에서는 실재와 사진, 원본과 복사본이 서로 흡사하기 때문에 위계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들은 닮음이라는 내재적 본성을 공유하고 있었고 이 기묘한 관계를 더 깊이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Button #1, 2014, Digital C-print, 60x73.3cm
Cord #1, 2014, Digital C-print, 60x73.3cm
Exhibition view of Three Faces, Two Places, One Device, 2014, Hada Contemporary, London, UK
K : 초창기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적극적으로 부모님을 피사체로 출연시키고 특정 상황을 연출해 촬영을 했다면, 이후로는 ‘부모와 자식’, ‘가족’ 등의 이미지를 경유함으로 기록으로서의 사진이나 이미지의 복제성 등 사진과 이미지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전개해 나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피사체에 대한 촬영자의 시선을 중개하는 카메라, 그리고 저장 장치(필름, 혹은 데이터)에서 인화지로 이어지는 과정을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관계로 은유한다거나(《Three Faces Two Places One Device》 연작 (2014)), 혹은 사진을 역으로 뒤집어 마치 목을 매단 사람처럼 보이게 함으로 - 작가님은 이를 “사진적 자살 시도"라고 하였습니다 - 원본과 복사본 사이의 연결 고리의 단절을 꾀하고(《Hanged Man》, (2016)), 심지어 손상된 가족사진 파일을 그대로 인쇄, 전시함으로 원본의 상실과 함께 그 기원을 상실한 복제본, 서사가 삭제된 이미지, 더 나아가 오늘날 비트로 구성된 디지털 이미지에 질문을 제기하는 듯도 합니다 (《Slice》 (2019)).  

A : 《Three Faces Two Places One Device》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사진의 매체적 성격을 비유하고 이를 체계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체계가 개념적으로 정리되자 《Hanged Man》부터는 이를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닮음의 구조, 부모와 자식,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개시한 것이죠. 이 변화의 시발점은 두 작업을 진행하던 시기에 저 역시 부모가 되었고, 다른 누군가의 원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에게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극심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나의 실패와 좌절이 나를 닮은 자식의 삶에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제가 사진적 자살을 통해서 나의 이미지를 소멸시킨다면, 즉 원본이 사라지게 된다면, 아버지, 나, 아들로 이어지는 닮음의 사슬 또한 끊어지지 않겠느냐는 발상에서 《Hanged Man》을 만들었습니다. 

《Slice》에서는 시각 자체의 상실을 통해서 체제의 붕괴를 유도합니다. 저장매체에 보관 중이던 가족사진 파일이 손상되어 복구가 불가능해진 일이 있었습니다. 충격에 휩싸여 망가진 파일을 훑어보던 중 사진의 위아래를 기준으로 절반은 살아남고 절반은 파편화된 사진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는 엉뚱하게도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 중 악명 높은 한 장면을 연상시켰습니다. 그것은 클로즈업한 안구를 면도날로 잘라내는 장면입니다. 마치 제 눈이 반으로 잘려 나가 가족사진의 반이 상실되어 버린 듯한 발상에 다다른 것입니다. 이 엉뚱한 연결은 시각 기능 자체가 상실되면 닮음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되고, 이로써 유사성의 체제가 붕괴하면, 닮음으로 구속되어 있던 나와 나의 자식 관계 또한 끊어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의 연쇄로 확장되었습니다.

두 작업 모두 부모 자식의 관계와 사진의 체제를 일종의 평행세계라고 전제하면서 후자에 균열을 만들어 전자의 붕괴 가능성을 입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Hanged Man #1, #4, #5, 2016, Digital C-print,79.2x59.4cm
20150208 #7, 2018, Digital C-print, 142.5x190cm(x3)
Slice!, 2019, DIgital screen, MDF, 1400x100x100cm
K : 앞선 질문에 이어 작업에 등장하는 어떤 장소, 혹은 장소에 대한 감각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전의 작업에서 보았을 때, 특정 환경을 구축해서 사진 촬영을 진행하는 것도 그렇지만, 더 나아가 <Hanged Man> (2016) 연작에서는 놀이터를 전시 환경으로 전유하였습니다. 놀이터의 기구에 매달린 -자살 시도를 하고 있는- 작가의 이미지는 독특한 컬러의 메트에 둘러싸이고, 이것이 다시 놀이터라는 환경을 만남으로 이미지를 둘러싼 내용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A : 놀이터와 자살을 연결한다는 자체가 제정신이 아니죠. 물론 실제 자살이 아니라 렌즈가 빛을 굴절시켜 상하좌우가 반전되는 현상에 기대어 자살한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내는 기행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Hanged Man》을 작업하던 당시는 제 아이가 한창 놀이터를 가던 시기였습니다. 실제 촬영 당시에도 아내와 아이가 대부분 함께했고, 아이는 그저 놀러 간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장시간 떨어져 있을 수 없는 나이이기도 했고, 아이가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노는 와중에 아빠가 이런 행위를 하고 있다는 양극단의 상황 또한 웃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인이 되면 놀이터 출입에 일정 부분 제약이 따릅니다. 특히 성인 남성이 혼자서 놀이터에 나타나면 따가운 눈총을 받기 쉽고 때로는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되면 아이와 함께 입장할 수 있는 일종의 면허가 발급됩니다. 당시의 저에게 있어서 놀이터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성립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한편 놀이터는 아이들에게 환상의 장소입니다. 특히 영유아기의 아이들에게는 각자의 독특한 상상이 펼쳐지고, 이를 공유하는 일종의 플랫폼과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성인에 가까워지면서 놀이터에서 쏟아내던 상상은 기억 저편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일시적이나마 허상이 실재와 같이 작동하는 곳입니다. 이러한 장소의 특성이 나의 허무한 사진적 자살 시도에 어느 정도 타당성을 보태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전시의 단계에서 놀이터 자체를 전시장으로 만들어 관객들에게 출입 면허를 내주고자 했습니다. 서울 유치원 전시의 경우 가벽을 높이 설치해서 관객들이 놀이 기구의 2층 난간으로 올라가야만 사진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사진 촬영 당시 자살한 모습을 흉내 내기 위해서 거꾸로 매달려 느꼈던 높이의 공포를 감각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중력의 힘으로 질식사하는 액사의 경우에도 높이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Exhibition View of Hanged Man, 2016, Seoul Kindergarten, Seoul, SK
K : 앞선 독특한 장소에서의 전시에 이어, 실제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장소에 대한 감각에 관해 얘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이는 ‘무덤’입니다. 이전의 작업에서는 부모의 죽음을 암시하는 상황의 연출, 그리고 이번 전시 《영원한 휴가》(2022)의 두 연작은 무덤의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묘비처럼 수직적인 구조로 늘어선 <영원한 다리들>과 흙으로 뒤덮여 바닥에 나열된 <영원한 미소들>이 그것입니다. 

A : 골수 유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성묘를 자주 다녀서 묘지에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따라다녔을 뿐 항상 따분한 일이었고, 심지어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해외로 유학을 떠나서 만난 묘지들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유럽의 묘지들은 아침에 조깅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도심 속의 공원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일반적인 공원과는 또 다른 특별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간, 현실과 단절된 듯한 평온함이 짙게 깔려 있죠. 이는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 담으로 뚜렷하게 경계가 그어진 고립된 공간이라는 특성, 그리고 욕망, 갈등,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죽은 자들의 장소라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전부터 사진 전시장이 무덤과 비슷한 고요함을 자아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리와 시간(duration)을 상실하고 박제된 듯한 사진의 무력한 상태가 시체를 연상시켰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휴가》에서는 사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관객들이 이번 전시의 사진들을 대할 때 신성한 예술작품이 아닌 이미 죽어버린 누군가의 묘를 대하는 무심한 거리감을 느끼기를 바랐습니다. 저의 가족 앨범 사진들이 오래전에 잊혀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구전동화 같은 상태이기를 원했던 거죠. 가족사진으로서의 생명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죽은 사진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죽음은 확실합니다. 세상이 온갖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에 반해서 죽음은 너무나도 명확하고 뚜렷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우리 삶의 일부이고 터부시되어야 할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죽음의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매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Exhibition view of Permanent Vacation, 2022, SeMA Storage, Seoul, SK
A cemetery in London taken by artist himself.
K : 이번 전시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직접 대상을 촬영하는 것이 아닌, 가족 앨범 속 가족사진을 작품으로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피사체를 대상으로 특정 감각이나 서사를 추출하기 위한 촬영보다는, 특정 성질의 사진 묶음에 결부된 지난 시공의 특정 감각이나 기억의 속성을 다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진이 담기는 여러 형식들 중 ‘가족 앨범’을 전유함으로 내밀한 기억 체계로 향하게 됩니다. 게다가 앞선 질문에서의 장소의 감각 - 무덤의 감각 - 과 연동함으로 기록된 피사체에 머무르지 않고, ‘기억’ 그 자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지시하게 되는 듯합니다.

A : 《영원한 휴가》에 사용된 사진은 모두 부모님이 보관 중이신 가족 앨범에서 찾았으며 <무제>를 제외하고 제가 촬영한 사진은 없습니다. 가족 앨범에 담긴 사진들은 나름의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 절차를 거쳐서 합격한 사진들입니다. 구도와 노출 등의 기술적인 완성도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연기와 연출도 심사 대상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진 속 등장인물들은 과하지 않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으며 정돈된 몸가짐으로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적 일관성보다도 더 중요한 조건은 해당 장면들에 결부된 기억의 성질입니다. 이를테면, 좋은 기억인지, 나쁜 기억인지와 같은 것입니다. 슬프고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을 연상시키는 장면은 탈락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들만 가족 앨범에 담기게 됩니다. ‘정제된 기억’이라는 철저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 편집된 사진들의 총체인 것이죠. 또한 유년 시절 기억은 미성년자라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대부분 타자의 영향권 아래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저는 주체적인 성인이 되어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사진에 제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개입할 수 있게 된 거죠.

반면 이 과정에서 탈락한 나쁜 기억들은 시각적으로 박제되지 못한 채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숨죽이고 있는 것일 뿐, 어떤 계기에 의해서 기습적으로 되살아나 존재를 과시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전시를 통해서 무의식을 깨우기 위한 의도적인 촉발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가족 앨범 뒤편에 숨어있는 어두운 기억을 모두 끄집어내 그 망령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고 싶었습니다.
Ahn Jinkyun's family albums
Ahn Jinkyun's family photographs
K : 이미지를 통한 의미의 전달에 있어서, 여타의 사진가와는 조금 다르게 온전하게 재현된 사진 너머 사진 자체의 훼손이나, 훼손된 사진 이미지의 사용과 같은 개념적 접근 역시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를테면 《Slice》(2019)에서 보여주었던 훼손된 이미지의 데이터나 이번 《영원한 휴가》(2022)의 사진에 적용한 이미지의 절단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의 전형적 감상으로부터 벗어나 재현된 이미지의 불완전함, 편집된 기억, 그리고 선택과 배제의 사관 위에 구축된 역사의 속성까지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마치 대표적인 기록 매체인 사진을 통해 그 기록된 이미지의 앵글 바깥을 향하게 하고, 사진의 메커니즘을 통해 인간의 기억과 기록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게도 합니다.

A : 《Slice》는 우연한 훼손이었고, 《영원한 휴가》는 의도적인 훼손입니다. 전자에서 우연히 발견한 형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해석을 더 했다면, 후자에서는 그 형식을 능동적으로 빌려와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가족 앨범 속의 등장인물들이 서로 헐뜯고 상처 주던 모습은 덮어두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뻔뻔하고 위선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미소 뒤에 숨겨놓은 치부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사진에서 미소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모두 가렸을 때 미소의 의미가 중의적으로 변하며 심지어 비웃는 듯이 보이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영원한 미소>의 웃음은 의식의 영역인 가족 앨범 사진의 일부를 가렸을 때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다리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제된 기억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합니다. 차렷 자세는 미소와 더불어 가족 앨범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대표 형식입니다. 주로 ‘누구’와 ‘어디서’를 과시하기 위한 사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서 다리의 시작점을 기준으로 상체를 가리며 신체가 땅에 처박힌 듯한 모습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알루미늄판에 압착한 사진이 나무를 날카롭게 베어내듯이 삽입되어 신체가 절단되는 듯한 느낌을 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기계적인 감각은 <영원한 미소들>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미소를 기준으로 사진의 좌와 우를 가로지르는 길쭉한 틈새를 열어두고 그 위와 아래를 흙으로 가렸습니다. 그런데 흙과 사진의 경계선을 마치 자를 대고 자른 듯한 날카로운 감각으로 구분하여 절단의 감각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가족 앨범의 기능은 정제된 기억을 지속함으로써 과거의 생명력을 연장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절단은 사진에 포함되지 못하고 무의식 속에 침전된 어두운 기억을 되살리는 동시에 가족사진이 표상하려던 것의 생명력은 정지시켜 죽은 사진으로 변환시킵니다. 설치의 단계에서 묘지와 비석의 형식을 빌려와 전시장을 사진의 무덤으로 만들고자 한 이유입니다. 이 기이한 장례를 통해서 비로소 나와 어두운 기억은 서로에게서 영원한 휴가를 떠나게 됩니다.
20150208 #3, 2018, Digital C-print, 142.5x190cm(x2)
Permanent Smiles #24, 2022, Digital C-print, Soil, MDF, 78x108cm
Permanent Legs #9, 2022, Digital C-print, Aluminum, Walnut veneer, 90x7.8x4cm
K : 《영원한 휴가》(2022)의 전시 구성상 마지막에 위치한 작업 <무제>(2022)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작가님의 주된 사진적 접근법 중 하나인 이미지의 훼손, 혹은 절단의 방법론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조금 다른 접근을 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는, 여타 작업과는 다르게 몹시도 ‘일상적인’ 오브제를 촬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상은 너무나도 당연한 환경과 조건이라는 점에서 통제의 바깥에 존재합니다. 통제할 수 없음이 아닌, 통제의 대상에서 제외된, 자연스러운 삶의 환경으로 존재하며 개인의 삶과 존재 양식을 대변하는 대상이라고도 생각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사진 위 절단의 제스처를 사용하지만, 기존과 같이 가리거나 훼손하는 방식이 아닌, 빛을 사용하여 이미지 위로 모종의 선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A : <영원한 휴가>를 통해서 과거와 완전히 결별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적어도 예술의 체계에서는 이미 장례까지 치렀으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현재에 관심을 두고 싶고 그 현재가 미래를 열어주리라 기대합니다. <무제>를 이 전시에 포함할지 말지에 대해서 끝까지 고민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라 창작자로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영원한 휴가>와는 별개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 없이는 전시의 감각적 확장이나 문맥의 확장이 닫혀버릴 것 같다는 주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이 전시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결국 포함했습니다. 순전히 감각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무제>는 제가 현재의 일상을 아무런 개입 없이 있는 그대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또한 사진의 가운데를 기준으로 위와 아래를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빛의 선은 분명 절단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마치 미세하게 열린 창틀 사이로 강렬한 빛이 어두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듯 사진을 가로지르는 빛은 사진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거대한 세계의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이 균열은 균열의 대상보다는 균열을 통해서 발견된 사진 뒤의 세계에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기존의 절단과는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균열이자 새로운 미래의 시작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Untitled, 2022, Digital C-print, LED strip, Walnut wood frame, 28.9x37.7cm
Permanent Legs sketch
Permanent Legs production in process
K :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원본과 사본의 관계로, 그리고 사건의 소멸과 시공의 기록이라는 사진적 속성으로 흥미롭게 연결한 것 같습니다. 복제는 곧 원본의 아우라를 소멸시키지만, 다시 사진의 성질을 통해 새로운 아우라, 혹은 의미의 지평을 탐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만약, 다루는 매체가 사진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연결고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 혹은 여타의 다른 매체로의 확장도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기술 복제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었고, 오늘날은 원본을 초월하거나 그 지위를 박탈한 복제본이 더욱 유효해진 환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제는 이제 가상 세계의 발전과 함께 스스로 가상 환경의 중추가 되어버린 듯도 합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 앞에서 사진의 지평에 대해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A : 사진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은 ‘무음의 정지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제가 영상 전공 중에 사진을 복수 전공한 이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고 영화관을 일종의 도피처로 여겼습니다.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들’처럼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세상에 몰입해 현실로부터 도망쳐 취하던 휴식에 매료되었던 것이죠. 반면 사진 전시장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시체처럼 힘없이 걸려있는 사진들이 자아내는 적막함은 마치 묘지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사진은 관객에 대한 지속의 구속력이 없습니다. 전시장에 머무르는 시간, 각 작업에 소요하는 시간을 온전히 내가 정할 수 있죠. 이렇게 소리와 시간(duration)이 결핍된 죽어버린 이미지의 상태에서 또 다른 매력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사진의 평면성은 부차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의 개념만 충족된다면 그것의 형태가 평면을 벗어나더라도 사진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전시에서 설치적 요소가 자주 보이는 이유도 이와 같은 사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사진의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진 예술의 확장성에 제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매체적 접근을 주된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사진 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비전통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이 때문에 외견상 사진예술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사진보다는 순수예술에 가까운 이상한 위치에 서게 된 것 같습니다
where is dad, 2012, Digital C-print, Aluminum, 81.3x12.7x61cm
where is mom, 2012, Digital projection, MDF, 80x107x177.5cm
K : 사실 가장 처음에 나누고자 했던 토픽을 가장 마지막에 꺼내게 되네요. 어쩌면 오늘날의 사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혹은 존재론적인 질문인 듯합니다. 현상을 찰나의 기록으로, 압축된 시간으로 담아내던 사진은 과거 회화의 재현성에 마침표를 찍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의 발전과 함께 모두가 손쉽게 보기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환경에서 동시대 예술로서의 사진 역시 어떤 위기에 봉착한 듯도 보입니다. 거기에 더해 개인의 일상을 프로젝션하는 플랫폼의 발달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가볍고 플랫하고 세련된 표피적 이미지가 득세하는 오늘의 조건에서 예술로서의 사진, 그리고 사진을 주요 매체로 다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A : ‘이미지 과잉의 시대’와 같은 표어는 더 이상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과연 이미지의 과잉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싶은 정도로 우리의 일상에서 과잉은 더해지고 있습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자극적인 이미지를 공급해 주는 플랫폼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시대의 선택이 이를 입증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사진은 이에 편승해서 따라가기보다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조용히 정지된 상태에서 관망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도구입니다.

사진이 우리의 삶 가운데 깊숙이 침투할수록 사진 예술의 지평은 넓어져야 마땅합니다. 근본적으로 예술은 보편에 대응하는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보편의 힘이 거대해질수록 그에 대한 반응도 비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실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빅터 버긴은 “예술이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산업화된 대중문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미디어에 의해 선전되어 패권을 거머쥔 일반 상식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일례로, 이를 성취한 2000년대의 대표적 미디어 예술가 중에는 볼프강 틸만스나 히토 슈타이얼 같은 작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등장과 일정한 시차를 두고 그들의 스타일을 그대로 복사해서 그들이 제시한 ‘대안’을 주된 형식으로 수용, 마치 또 다른 유행이나 문화 소비재로 둔갑시켜버린 일부 작가들의 솜씨와, 그들에게 수많은 기회를 선사한 동시대 예술계를 보면 과연 ‘패권을 거머쥔 일반상식’의 자기 갱신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하지만 소수의 ‘대안 제공자’들이 견뎌내고 존재하는 한 사진 언어는 끊임없이 재정립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리라 기대합니다. 마치 회화와 조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K : KIM Sung woo (Curator, Primary Practice)
A : AHN Jinkyun (Artist)

K: Hello, I’m Sung woo Kim. It feels like we’ve spent a lot of time now observing each other’s practices, as a curator and an artist. Fortunately, we have the opportunity with this latest exhibition Permanent Vacation (2022, SeMA Storage) to talk about oeuvre, from your past work to your more recent work and your thoughts on photography today.

When I think of the first time I saw your work, it didn’t seem to fit easily into any of the current trends in photographic work that you see in Korea. I recall that this seemed to have to do with your attitude toward the photograph. A lot of the photography work you see today is very polished in terms of form—as exemplified by very fine surfaces that end up seeming cold. It tends to end up as very flat surface images that omit any kind of surrounding narrative. In contrast, your work seems to have different layers to it.

Rather than focusing on a design aesthetic in the photographic image, your work seems to involve staging awkward or comical situations, where the viewer has to interpret the specific idea surrounding it. So rather than “viewing” a formal aesthetic, you have to “read” the content present within that situation. The angle that you approach photography from appears to be less a matter of the condensed “recording” of objects, times, and spaces through the lens, and to emerge more out of a critical stance toward the properties of photography as a medium. There’s also the aspect that you encapsulated when you talked about how you were “investigating the similarity between parents and child through the very properties of photographic representation.” In a word, it has to do with the hierarchy between the photographer and the photographed that takes shape through the camera’s mediation.

A: In terms of how I look, I’ve often heard people talk about how “peculiar” I am in basic behaviors like the way I walk. “Peculiar” is kind of a nice way of putting it—it gives the sense that I’m subtly deviating from what is considered “normal.” There have often been situations where I’ve been talking seriously about something, and ordinary people think that I look comical. Conversely, there are also serious situations where I’m the only one laughing out loud.

When I presented the scene in Dance Dance Dance where my parents are dressed finely and dancing in the place where they’re going to be buried after their death, I thought that situation would come across as comical. But I didn’t expect that people would also think the same thing about the image of me dancing along with them. I saw my manic dancing there as a cynical way of resisting the absoluteness of death; I never conceived of it as slapstick. That’s just one immediate example. I’ve tended to have a very non-mainstream quality about me ever since I was in school.

I feel like a strong undercurrent to my perspective is a sense of unease and discomfort with these sorts of “incongruities” that deviate from what is considered typical. I harbored these fundamental questions about why I couldn’t be in “harmony” like these other people. To find an answer, it seemed like I needed to take a step back and analyze that structure. That’s also why my early work focused so heavily on “Plato’s Allegory of the Cave” structure.
Dance Dance Dance, 2006, Digital C-print, 50.8x50.8cm(x3)
K: What I sensed in it was something comical, but not slapstick or anything like that. I suppose you could say it was closer to cynical humor. When you’re dancing in front of your parents’ grave in the Dance Dance Dance series (2006), it seems ridiculous at first, but at a certain point it starts to evoke the image of a bellowing madman. I also feel like that cynicism is a quality that hangs over your photographic series as a whole. In Masquerade (2006), the stereotypical family photo on the wall in back and the way the parents always assume the same formation on either side does not seem to deviate from what we think of as typical. But things like the TV screen at the center showing images of their child filming them, or the parents appearing in different masks to be filmed, are departures from the family photograph stereotype that also come across as a cynical take on the fixed images we have, our conventional perspectives and the stereotypicality attached to them. The nature of photography as a medium is as a factual documnetation of concrete phenomenon, which means that it lends itself to emphasizing the properties of the image and the stereotypical qualities associated with that. In other words, it feels like the object of cynicism here is the image-as-stereotype, the universal perceptions and ideas that we’ve internalized through the image.

A: I am actually extremely cynical. At heart, I’m deeply distrustful of people and the world, and I despise authority and “face.” That’s why I love Natsume Sōseki’s fiction so much. Most of the people in his novels are so distrustful of others that they segregate themselves from the world and live in isolation. They’re choosing seclusion to protect themselves from being disillusioned by other human beings. Yet even in their seclusion, they’re constantly going back and forth with inner conflict. You can’t completely ignore disharmony with the world.

I feel like I’ve adopted that seclusion as an art form. As uncomfortably cynical as I am in my actual life, I wanted to be pathetically unreal within the system of art. Art is the other side of reality, it’s a dream, and it’s a world of the unconscious. It’s an essential prerequisite for the belief that my crazy dancing and laughing at death holds any real power, or for the belief that my parents’ faces are actually diluted by the different comical masks they wear.

For me, photography is an effective vessel for containing those silly beliefs. That’s because it’s a deceptive medium. Photographs are just collections of little particles, yet we automatically associate the two-dimensional images they form with their real-world three-dimensional counterparts. It’s because photography’s ability to represent reality is so outstanding that it can more perfectly delude us that the dreams in the image are real.

But the second we take a step back and remind ourselves that what we just saw is a photograph rather than reality—the second we return to reality, that is—the sincere belief within the photograph is reduced to empty foolishness. We adopt a cynical attitude toward the real belief that I so desperately wanted to realize in the world of art. Like the characters in Natsume Sōseki’s fiction, it ends up with that self-deprecation, where no matter how much I might flee, my real-world self can never really be free from disharmony with the world.  ​​​​​​​
Masquerade #1, #3, #4, 2006, Digital C-print, 50.8x50.8cm(x3)
K: You made an interesting analogy just now to Plato’s Cave. The phenomena we observe are incomplete representations of the truth. I also feel like the images we see may just be incomplete, confused shadows of reality. So to follow your analogy, does the tool you use—photography—provide the most effective method to approach the fundamental questions? How can you go about capturing these basic questions, reality, truth, and ideas within your camera’s images?

A: The camera allows me to take a step back from all the things my eyes perceive. If we compare it to Plato’s Cave, it means leaving the position of the prisoners who are tied up in the cave, believing that the shadow on the wall is the only reality, and going behind them to stand with the person making the shadow. So I’m taking on the position of someone who can observe what’s happening. I’m also undermining the authority of the things we believe to be real by showing how easily and perfectly they can be represented. I’m leading you to question whether we aren’t also the prisoners in the Cave. Immediately, that lifts some of the weight of existence that not only threatens my identity but sits in front of me, holding me down. I also see that as a form of cynicism.

There is no “truth” that can be captured in a photograph. Photographs work as devices for failure. When I dance in Dance Dance Dance, it’s in the knowledge that I’m only pretending to capture real belief in the photograph, but that it’s a fool’s errand. Photography is only valid for invalidation. That structure of invalidity is what I’m trying to show through my photographs. The instant I stand up and move away from the prisoner’s position, all the visual things I had trusted in before are invalidated. Similarly, as soon as I turn the things I see before me into shadows—as soon as I use this light-capturing camera to make you perceive those things as shadows—I’m able to invalidate them.
Encave #1, #2, #3, 2010, Digital C-print, 101.6x151.4cm(x3)
K : I feel Encave (2010) is the series where you attempt to illustrate that cave structure most directly. To film it, you actually did create a system where shadows formed on a white sheet. But it doesn’t seem to represent the position of the person showing shadows to the prisoners—the position of being able to survey things as a photographer. If anything, it seems like even the photographer ends up one of the prisoners. In other words, everything is within that stage, including the artist and all the lighting and other equipment used for filming. It really gives the impression that you’re ceding that gaze, that observer’s authority, to the image’s viewers.

Another interesting thing about the Encave series is your approach where you seem to be positing your parents as your own “shadows.” There’s you seen from behind, your parents as you see them, and the image of your parents that the camera captures in real time and projects simultaneously on the white sheet. You have the “shadow parents” as an image created by the optical device of the camera, and you have the real “shadow parents” that the son is facing. It seems like you created a very structured situation for the image.

A: I came up with the idea for Encave while looking at my parents’ empty grave site. From my position looking at this site my parents had set aside for when they passed away, I felt like I was in a similar situation to the prisoners in Plato’s Cave. As their child, I had a responsibility and obligation to observe that process of the empty site becoming an actual grave and the landscape that would be changing over the decades that followed. To me, that felt like an inescapable constraint. I thought that if I could demonstrate—if only at the vain level of art—the possibility of taking a step back from that structure of death and viewing it in its entirety, that might be a way of chipping away at the absolute nature of that constraint. 

And so I built my own “Plato’s Cave.” I hung up fabric in my studio to create a temporary stage. Intuitively, it seems more like a stage than a cave, but that has to do with Plato’s Cave being both a metaphorical concept and also an archetype for the stage. With the fabric, I wanted to express the flimsy nature of the illusions in the cave, which the prisoners believe to be real. On that stage, I present the relationship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with my parents playing the parents and me playing the child. In effect, we become the illusions resembling us in the cave.

The “me” on the stage keeps bowing to my parents’ shadow, which I mistake for the real thing. The bowing here is intended less in a ritual sense than as a symbolic action def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parents and children—sort of like the traditional New Year’s bows. The illusions sometimes appear as shadows or as images digitally projected in real time. My parents’ shadows come and go, sometimes joining together to make me or appearing together with an illusion of me. It’s similar to how my parents came together to conceive me, and how we spend time together until they precede me in death. In the cave, we theatrically allude to the illusions of life and death, we present all the different parts of the process of making the illusion, and we show ourselves succumbing to the illusions we’ve created. In that framework, we’re both the agents making our illusions and the prisoners mistaking the illusion for reality, and in that sense we become the illusion itself. Alternating between the roles associated with Plato’s Cave, we’re showing our freedom from constraints, demonstrating how it is always possible to blend the illusions in the cave with the reality outside it. By creating and experiencing the death that we will someday face, we can ultimately gain a little bit of freedom from it. ​​​​​​​
Encave #13, #15, #14, 2010, Digital C-print, 101.6x151.4cm(x3)
K: I’d also like to talk about photographic subjects. The concrete truth (or realistic representation) captured in the photograph starts with the photographic object. Given the documentary nature of photography, the object at the center of the image has always been an important question. Between the early and middle stages of your career, you quite frequently had your parents as that object.

A: At first, I think I made my parents the subjects of my photographs because of the trivial conflicts that arise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There may also have been an aspect of me caricaturing my parents as a way of resisting authority. Over time, that developed into fundamental questions about my own origins and these people who looked like me. Pivotally, that experience with the empty grave site led me to see in my parents an image of the death that I would someday have to confront. So the object shifted from my actual parents to the illusory “image” of my parents. 

In my work, my parents appear strictly as images. It’s less a case of them participating, and more of me borrowing their image. Or perhaps I wanted to express my attitude toward them at the level of the image—the attitude that it’s just an image, and nothing to be grateful for or sad about. I show that attitude most directly in Three Faces Two Places One Device. There, I’m “playing” with my parents’ image like a child playing with blocks.

At the same time, I also started exploring the role and properties of the photographic medium—form, in other words. Moving away from this complacent approach where I’m simply “capturing” my parents as objects in my work and that’s it, I started looking for ways of creating a dynamic relationship between theme and form. In the process, I arrived at a discovery, namely that my subjects and forms shared certain similarities. Just as parents and children are subordinated to their mutual resemblance at the visual level, the realm of photography is one of similarity between reality and photograph, original and copy, and there’s a hierarchy that forms as a result. They shared “resemblance” as an inherent quality, and I started to delve more deeply into that curious relationship.
Button #1, 2014, Digital C-print, 60x73.3cm
Cord #1, 2014, Digital C-print, 60x73.3cm
Exhibition view of Three Faces, Two Places, One Device, 2014, Hada Contemporary, London, UK
K: In contrast with that early to middle period where you frequently used your parents as photographic subjects and staged particular scenarios, your subsequent work seems to use images of “parents and children” or “family” as a means of expressing a critical stance on photography and the image itself, such as the photograph as “document” or the replicable nature of the image. For instance, you use the relationship connecting parents with children as a metaphor for the process leading from the camera as a mediator of the viewer’s gaze of the object and the associated storage mechanisms (film or data) to the printed photograph (Three Faces Two Places One Device series, 2014). You also invert photographs to give the impression of a hanged person—what you refer to as a “photographic suicide attempt”—as a way of severing the link between the original and copy (Hanged Man, 2016). You even print out and display corrupted family photograph files in order to pose questions about copies that lose their “origins” when the original version is lost, about images from which narrative has been removed, and about the digital images of today, which consist of bits of data (Slice, 2019). 

A: Three Faces Two Places One Device was a work where I drew an analogy between the parent/child relationship and the nature of the photography medium and developed that into a system. Once that system had been conceptually formulated, I began breaking it down with Hanged Man. I started thinking about how it might be possible to achieve liberation from that structure of resemblance, from the relations of parent/child and original/copy. The start of that change came from me becoming a parent myself around the time I was doing those two series—I had become someone else’s “original.” It was great to discover myself in my child, but it also stirred up a great fear: I was worried my own failures and frustrations might end up repeated in the life of this son who looked like me. I created Hanged Man based on the idea that if I could destroy my own image through an act of “photographic suicide”—if the original disappeared—maybe that could break the chain of resemblance going from my father to me to my son. 

In Slice, it’s the loss of the visibility itself that brings about a collapse in the system. While I was storing family photographs as files, they became irrecoverably corrupted. As I was looking over the damaged files in my shock, I could see that if you looked at them in terms of top and bottom halves, about half of the photographs had survived and the other half had become fragmented. For whatever reason, this reminded me of that notorious scene in Luis Buñuel’s film Un Chien Andalou (1929)—the one where a razor slices through an eyeball in close-up. I had the feeling like my own eye had been cut in half, so that half of the family photograph had ended up lost. That bizarre connection turned into a chain of ideas: if the visual function itself was lost, then the resemblance no longer held, the system of similarity broke down, and that might be a way of breaking the chain of me and my son being bound together by resemblance. 

Both these works posit the parent/child relationship and photographic system as parallel worlds in a sense. The approach is one where creating cracks in the latter shows the possibility for the former to break down.
Hanged Man #1, #4, #5, 2016, Digital C-print,79.2x59.4cm
20150208 #7, 2018, Digital C-print, 142.5x190cm(x3)
Slice!, 2019, DIgital screen, MDF, 1400x100x100cm
K: Following on that, I’d like to talk a bit about the places that appear in your work, or about your senses of those places. In your previous work, you constructed particular environments to photograph in, but in the Hanged Man series (2016), you repurposed a playground as an exhibition setting. The images of you hanging from playground equipment—your “suicide attempts”—are surrounded by interestingly colored mattes, and as these combine with the playground environment, they seem to add a more dramatic quality to the content surrounding the image.

A: It’s not really sensible of me to draw a connection between “playgrounds” and “suicide.” Of course, it’s not actually suicide—it’s my own bizarre attempt to mimic someone who’s killed himself by taking advantage of the way images get inverted as the lens refracts the light. At the time I was making Hanged Man, my son went to the playground a lot. Even during the actual filming, my wife and son spent most of their time together, and I thought my son was just going there to have a good time. He was also at an age where they couldn’t be apart for very long, and I thought it would be amusing to have those two extremes, where the father is doing this radical performance while his kid is just having a good time at the playground. 

When you grow up, there are certain limits on your ability to visit playgrounds. If an adult man in particular shows up at a playground by himself, he’s likely to get glared at or arouse needless suspicions. But when you become a father, you’re given a kind of license to go there with your child. For me at the time, the playground was a place where the parent/child relationship became valid.
For children, however, the playground is a place of illusion. To very small children in particular, it’s like a platform for giving free rein to and sharing all the curious things you imagine. But as you get older and approach adulthood, all the imagination you let loose on the playground fades away like a mirage in your memory. It’s a place where illusion operates like reality, however temporarily. I thought those aspects of the setting might add a bit of legitimacy to my hollow photographic suicide attempt.

At the exhibition stage, I wanted to make the playground a venue in order to give the viewers a license to visit. For the Seoul kindergarten exhibition, I put the wall up high for the exhibition so that viewers would have to climb to the railing on the second level of the playground equipment to see the photographs. I wanted to give them a sense of the fear of heights I experienced hanging upside down for my mock “suicide” when I was taking the pictures. Altitude is also an essential element for death by hanging, where you’re suffocating due to the force of gravity.
Exhibition View of Hanged Man, 2016, Seoul Kindergarten, Seoul, SK
K: In addition to your exhibitions happening in unusual places, I’d also like to talk about your perceptions of another space that often appear in your work: the grave. You’ve actively drawn on the nuances of the grave in your previous work, where you arranged situations that alluded to your parents’ deaths, and the two series in your latest exhibition Permanent Vacation (2022). Those are Permanent Legs, which is presented in a vertical structure resembling tombstones, and Permanent Smiles, which is presented on the ground covered by dirt. 

A: Because I grew up in such a rigidly Confucian household, I was acquainted with cemeteries early on due to our frequent visits to family grave sites. But I was only going out of obligation because my father forced me. I always found it boring, and I’m actually a Christian. Even so, it came as a shock to me when I saw cemeteries overseas after going abroad to study. The European cemeteries especially were like parks in the city, with people jogging there in the mornings. But there’s a special mood there that’s different from other parks. It’s a profound undercurrent of peace and disconnection from reality, like you’ve crossed over from life into death. It comes from them being isolated spaces in the bustle of the city, clearly marked off by fences, and from them being the place of the dead, who have been forever liberated from desire, conflict, and suffering.

I’ve long seen the photographic exhibition as evoking a serenity that’s similar to a tomb. Having lost the elements of sound and duration, the photographs appear helpless, frozen in amber, and that conjures up associations with a dead body. In Permanent Vacation, I wanted to more clearly show the shadow of death that hovers over photographs. When viewers are looking at the images in this exhibition, I don’t want it to feel like a “sacred” work of art; I want them to experience the casual sense of distance that we feel toward the grave of someone who has already passed on. I wanted the family album photos to be in a state much like a folktale that was forgotten long ago, so that you can’t remember what it was about. I meant for them to be “dead” pictures, images that have completely lost any sense of life as family photographs.

Death is inescapable. The world is full of uncertainties, but death is very definite and clear. If there’s one thing that’s certain in the world, it’s that we all die someday. That’s a very natural part of life, and I don’t think it should be treated as taboo. I have a fascination with that absolute certainty of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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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view of Permanent Vacation, 2022, SeMA Storage, Seoul, SK
A cemetery in London taken by artist himself.
K: One interesting thing about this exhibition is that you use family photographs from an album rather than photographing your subjects yourself. Instead of filming something in order to extract a particular sense or narrative, it looks like you’re working with the properties of certain senses and memories associated with past times and spaces, which are bound up in a photo album with a defined character. Also, by appropriating the “family album” out of all the different ways of capturing photographs, it becomes oriented toward a system of personal memories. The linkage between this and what I mentioned in the last question about the sense of the place—the sense of the grave, in other words—means that it becomes more than just a recorded object; you seem to be referring to memory itself as an object.

A: The photographs used for Permanent Vacation were all found in a family album that my parents had kept. Apart from Untitled, I didn’t take any of the photographs in the exhibition. When pictures are kept in a family album, they’ve passed the rigorous standards of a certain selection process. The things that are taken into account don’t just include the technical quality in terms of aspects like composition and exposure; they also include the staging and the performances by the figures who appear in them. In most photographs, people have pleasant smiles that are not too over-the-top; they look neat and sit in straight postures. But there’s a more important factor than this formal consistency, which is the quality of memory attached to the images in question—things like “Is this a good memory or a bad one?” You leave out the images that remind you of sad, painful, or trying times, and you include only the moments that were pleasant, happy, or beautiful. The family album is an assemblage of photographs produced and compiled entirely in the service of “polished memory.” It also reflects the fact that our memories of childhood are shaped for the most part by the influence of others, where we’re in the passive position of being minors. Now that I’m an adult with agency, I can bring my own intentions and will to bear on the photographs made by others.

In contrast, the bad memories that get winnowed out in the process aren’t preserved visually, so they seem to disappear out of our memory. In reality, they’re just hiding out quietly in our unconsciousness, where they sometimes spring to life all of a sudden and make their presence felt when something or other happens. Through this exhibition, I wanted to create an intentional trigger for awakening the unconscious. I wanted to draw out all the dark memories hidden behind the family album and see how those ghosts are still alive and well.
Ahn Jinkyun's family albums
Ahn Jinkyun's family photographs
K: In terms of communicating meaning through the image, you adopt a somewhat different approach from other photographers. I find your conceptual approach quite interesting, in how you go beyond the fully represented image to damage the photograph itself or to use damaged photographs. With the corrupted image data you showed in Slice (2019) or the truncation of images in Permanent Vacation (2022), you’re going beyond the typical image appreciation that we’re accustomed to and evoking the incompleteness of the represented image, the ways our memories are edited, and the nature of history as something constructed through perspectives of selection and exclusion. You’re turning your attention outside the angle of the image recorded through photography, which is regarded as the documentation medium par excellence, and you’re using the photographic mechanism to encourage the viewer to think critically about the limits of human memory and recording.

A: In the case of Slice, that was accidental damage. In Permanent Vacation, the damage is intentional. The former was more about me passively receiving images that I had happened across and interpreting them in new ways; in the latter, I was actively drawing on those images and using them to achieve a specific purpose. I think it’s shameless and hypocritical for the people in the family album to smile these benign smiles while glossing over all the times they hurt each other and tore each other down. So I asked myself how I might be able to show the shame concealed behind the smiles. And what I discovered was that when you leave the smile in a photograph and cover everything else, the smile’s meaning becomes ambiguous—it may even seem mocking. So the smiles in Permanent Smiles could be seen as representing the hidden, unseen unconscious realm that ironically emerges when you obscure parts of family photos, which exist in the realm of consciousness. 

Permanent Legs similarly shows a critical stance toward polished memory. In addition to smiles, upright posture is another form that you repeatedly see in family photos. You typically see it in pictures that are meant to show who was there and where it was. By turning this around and obscuring the upper body from the legs up, I created images that look like a body embedded in the ground. At the same time, I mounted the photographs into cold aluminum sheets and inserted them in a similar way to sawing through wood in order to give the feeling of a truncated body. You can see the same kind of mechanical quality in Permanent Smiles. I created long spaces from left to right around the smile in the photograph and covered everything above and underneath in dirt. I wanted to convey the feeling of “truncation” by having the boundary between the dirt and the photograph feel sharp, like it had been cut along a ruler’s line. 

The purpose of a family photo album is to prolong the life of the past by perpetuating polished memories. This truncation revives the darker memories that weren’t included in the photograph, the ones that have settled within the unconscious, and it also turns it into a “dead” photograph by suspending the life of what the family photo sought to represent. That’s why I decided in the installation stage to borrow the forms of the “cemetery” and “gravestones” in order to make the venue into a photographic tomb. It’s through this bizarre funeral that the dark memories and I take a permanent vacation from each other.
20150208 #3, 2018, Digital C-print, 142.5x190cm(x2)
Permanent Smiles #24, 2022, Digital C-print, Soil, MDF, 78x108cm
Permanent Legs #9, 2022, Digital C-print, Aluminum, Walnut veneer, 90x7.8x4cm
K: I’d like to talk about Untitled (2022), which is situated at the very end of the Permanent Vacation exhibition (2022). In this work, you use some of your chief photographic methods—namely damaging or truncating the image—but the approach here comes across somewhat differently. That may be because you photograph objects that are quite “ordinary” in comparison with your other work. Ordinariness exists outside the realm of control, in that we see those kinds of environments and situations as quite natural. It’s not that they can’t be controlled—they exist as natural environments of life, not treated as something to be controlled, and they represent individual lives and ways of being. You apply the same gesture here with the truncation of the image, but you aren’t obscuring or damaging things like before. Instead, you’re using light to draw a kind of line over the image.

A: I’d like to believe Permanent Vacation was a way for me to say goodbye to the past forever. I know that’s not realistically possible, but within the system of art, I feel like I’ve held the funeral now, so I’ve done everything there was to do. I want to focus on the present now, and I hope that present will open up the future. I debated up to the end over whether I should include Untitled in this exhibition. It’s still a work in progress, so I don’t fully understand it as a creator, and I also saw it as being a separate work from Permanent Vacation. But when others suggested to me that the sensory expansion of the exhibition, or the expansion of its context, might be foreclosed without that work there, I couldn’t help but agree. So I ultimately included it, as closing the end didn’t really fit with the aim of the exhibition. It was a purely sensory decision. 

As you mentioned, Untitled is a photograph where I captured my current “everyday” experience as it is, without any intervention. The sharp line of light that divides the photograph along the middle from top and bottom is definitely a case of applying truncation as a form. Cutting across the photograph like a powerful beam entering a darkened room through a thin crack in the window, the light alludes to the potential for a vast world that may exist behind the image. I see that crack as being different from my past forms of truncation, in that I’m encouraging a stronger interest in the world behind the image that is discovered through the crack, rather than in the object associated with the crack. I’ll say that it’s a crack that exists in the present moment and the start of a new future.
Untitled, 2022, Digital C-print, LED strip, Walnut wood frame, 28.9x37.7cm
Permanent Legs sketch
Permanent Legs production in process
K: It feels like you’ve drawn fascinating connections between the parent/child relationship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riginal and copy, while associating the disappearance of events with the photographic properties of recording time and space. Reproduction removes the aura of the original, but I also think it explores a new aura or new horizons of meaning through the properties of the photograph.

There’s one other thing I find myself thinking: I’m curious whether you would have discovered this connection if you were not someone who deals with photography as a medium, or whether you’ve ever thought about branching out into different media. Advancements in digital technology have only accelerated technological reproduction, and it wouldn’t be going too far to suggest we live in an environment today where copies have assumed even greater validity than their originals—where the copy has transcended or superseded the original. Now, with the development of virtual worlds, those copies seem to have become pivotal to virtual environments. I’m curious what you think of the horizons of photography in the face of this transformation in the environment.

A: I think the most basic quality of the photography is the fact that it presents a silent, suspended state. That has something to do with my own history as someone with a dual major in photography and film. I’ve loved films since I was a child, and I regarded the cinema as a kind of refuge. Like one of the prisoners in Plato’s Cave, I was enthralled by the respite it gave me to flee from reality and immerse myself in this overwhelming world projected before me. Photography exhibitions are the exact opposite. The sense of desolation evoked by photographs hanging limply like corpses gives you the feeling like you’ve entered a cemetery. Photography doesn’t exercise the binding force of continuity on the viewer. It’s entirely up to me how long I spend in the gallery and how much time I spend with each work. So I discovered a different sort of enchantment in the image’s state as something dead, lacking sound and duration.

I see the two-dimensionality of photography as a secondary element. As long as it meets the conditions of photography as a concept, I view it as photographic art, even if the form goes beyond the two-dimensional realm. This understanding of the photograph is also why my exhibitions so often include installation elements. I don’t see the photographic form as something fixed, so I don’t think there are any limits to the expansion potential of photographic art. While I may use medium-based approaches as my chief methodology, I’m quite non-traditional in my understanding of the photographic medium. That may explain why my work occupies a strange place that’s more akin to fine art than to traditional photography, even though it outwardly appears like photographic art.  
where is dad, 2012, Digital C-print, Aluminum, 81.3x12.7x61cm
where is mom, 2012, Digital projection, MDF, 80x107x177.5cm
K: The last thing I want to talk about is what I actually wanted to talk about first in this conversation. It seems like the most essential or existential question about photography today. As photography historically captured phenomena through momentary records and condensed time, it also have lead to the crisis of representation in painting. But now, in an environment of technological advancements where anyone can take a beautiful picture with ease, it seems like photography as a contemporary art form is also facing another crisis. That situation has only been accelerating with developments in platforms for projecting our day-to-day lives as individuals. What meaning can the photograph as art hold—or the use of photography as one’s chief medium—in a contemporary condition where lightweight, flat, sleek, and superficial images have gained ascendancy?

A: I don’t think expressions like “era of excess images” hold any meaning anymore. There’s so much more excess in our everyday lives that you have to wonder whether such a thing as “excess images” is even possible. This is borne out by the choices of our era, where the ones winning the competition are the platforms that supply images that are faster, more plentiful, and more stimulating. My understanding of photography is as a tool not for hopping on this trend, but for creating a place to take a step back and contemplate things from a state of quiet stillness. 

The more deeply photography pervades our lives, the broader the horizons of photographic art should be. At root, art offers a different perspective in response to the universal. I believe that the vaster the forces of the universal are, the more they demand a proportionate response. The reality isn’t always like that, though. 

Victor Burgin said, “I think that the most important work that art can attempt is to provide alternatives to the hegemonic popular common sense created by industrialized mass culture and propagated by the media.” For example, you could point to people like Wolfgang Tillmans or Hito Steyerl as being among the preeminent media artists of the 2000s who have achieved this. But at a certain point after they appeared, you had other artists who copied their style, who adopted their “alternatives” as their main form. To see the abilities of artists who have turned that into a different sort of fashion or cultural consumer item, and the contemporary art world that has offered them so many opportunities, you gain a new sense of the tremendous powers of self-renewal that “hegemonic popular common sense” possesses. Even so, I expect that photographic language will be continually redefined and new possibilities will be discovered as long as there are a few people out there holding firm and “providing alternatives”—just as we’ve seen with painting and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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