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권력, 아버지, 거울, 그리고 카메라

사진가 제프 월의 <여성을 위한 사진(Picture for Women)>(1979)은 시선과 권력의 관계를 다룬 그의 대표적 사진이다. 원근법이 정확히 구현된 공간 안에 카메라를 응시하는 여인과 그녀를 바라보는 작가 그리고 소실점의 위치에 카메라가 놓여있다. 그 모든 광경은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다. 월의 이 사진은 거울이 등장하는 미술사의 두 회화를 참조하는 것으로 흔히 이야기된다. 먼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1656)인데, 이 그림은 화면 중앙에 놓인 작은 거울에 비친 국왕 부부의 시선으로 화가를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이 배열되어 있어 당시 왕의 절대적 권력을 암시한다. 보다 직접적인 참조 대상은 마네의 <폴리베르제르 바(A Bar at the Folies-Bergères)>(1881-2)다. 바의 전면 거울을 등지고 서서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을 그린 이 그림은 측면에 남자와 얘기 중인 듯한 여인의 뒷모습을 그림으로써 여인에 대한 화가의 두 시선을 담은 것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월의 <여성을 위한 사진>에는 거울 속 카메라를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과 거울 속 여자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얽혀 있고 그 두 시선과 공간 전체의 모습은 물론, 카메라 자신까지를 모두 조망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있다. 월은 권력자의 시선에 의한 <시녀들>이나 화가의 선택적인 시선에 의한 <폴리베르제르 바>와 달리, 모든 시선의 중심에 놓인 카메라의 절대적 권력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안진균은 본인의 삶과 관련해 이러한 시선과 권력의 관계를 해석하는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은 살아계신 부모님의 묏자리에서 시작한다. 언젠가 본인들이 죽어서 묻힐 자리에 서서 작가의 부모님은 비디오카메라를 바라보며 즐겁게 포즈를 취하고 작가는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모니터로 바라보며 카메라 셔터를 쥔 채 흥을 주체 못하고 신나게 춤을 춘다. 동작이 조금씩 다른 삼면화 형식으로 된 이 다소 불경스러운 사진의 제목은 <댄스 댄스 댄스(Dance Dance Dance)>(2006)다(이하 이 글에 기재된 작품의 한글 제목은 원 영문 제목을 기준으로 필자가 임의로 작성한 것임). 사진 속 누구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지 않지만 조명, 비디오카메라, 모니터, 셔터와 모든 기기의 전선까지 사진의 구조 및 과정을 드러내는 모든 장치들을 그대로 방치하여 카메라의 절대적 시선을 강조한다. 비슷한 시기 장소를 부모님의 거실로 옮긴 10장의 연작 <가장(Masquerade)>(2006)에도 마찬가지로 부모님과 작가가 등장한다. 이번에는 부모님의 시선은 우스꽝스러운 가면으로 가려지고 텔레비전 모니터에 비친 본인은 고개 숙여 카메라를 바라봄으로써 시선이 배제된다. 그러나 이 사진에는 앞서 말한 월의 사진처럼 정 중앙에 카메라가 놓여있는데, 그것은 화면 밖에서 이 전체 광경을 찍는 카메라와 작가의 모습을 찍고 있는 비디오카메라다. 이 사진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는 셈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구조를 한 화면에 담아 최종 이미지로 만드는 것은 하나의 (사진)카메라다. 이처럼 작가는 부모님과 본인을 함께 무대의 배우로 올려 사진을 찍되 인물들의 시선은 카메라에서 거두고 직간접적으로 카메라의 존재를 드러내어 카메라의 시선에 절대적 권력을 부여해왔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부모님과 자신의 관계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동굴에 가두다(Encave)>(2010)의 경우가 그 극명한 사례인데, 이 연작은 흰 천으로 플라톤의 동굴을 연상케 하는 하나의 무대를 만들고 그 안에 부모님과 자신을 등장시켜 부모님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절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부모님 뿐 아니라 자신까지 유교적 질서로서의 가상의 동굴을 벗어날 수 없을 보여주고자 한다. 전작들처럼 부모님을 직접적으로 희화하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유교 문화 내에서 부모님과 자신의 관계 자체를 카메라 앞의 대상으로 만들어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한편 <신비의 저택(Villa of the Mysteries)>(2012) 연작에서는 유사한 주제를 부모님의 거실로 옮겨 이어 나간다. ‘신비의 저택’은 화산재에 도시 전체가 묻혀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그 덕분에 많은 유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고대 도시 폼페이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특히 저택 내부에 그려진 디오니소스와 여러 인물들의 의식을 그린 프레스코화는 화산 폭발로 인한 죽음을 목격한 적이 없는 듯 화려하고 생생하다. 작가는 이러한 ‘신비의 저택’을 모티브 삼아 삶과 죽음의 교차 지점을 바라보고자 했다. 앞선 연작에서 직접적으로 부모님의 미래의 죽음을 언급했다면, <신비의 저택>에서는 부모님이 현재 살아가는 곳으로 장소를 옮겨 삶과 죽음이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앞선 연작들에서 본인이 함께 등장한 것과 달리, 이 사진들에서는 카메라 뒤로 본인을 숨겨 부모님을 완벽한 피사체로 대상화함으로써 그들과의 연관성을 최대한 배제한 채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다양한 자세를 요구하거나(<바라보기(Gazing)>, <가리기(Covering)>, <숨기(Hiding)>, <한 발 앞으로(One Step Forward)>) 촬영 후 신체를 가로 질러 사진을 잘라내 대칭으로 다시 붙이고(<데칼코마니(Decalcomanie)>) 인물 대신 구조물을 등장시키는() 등 보다 적극적인 대상화를 시도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화하고 사진의 사각 틀 안에 그들을 가두어 온전히 이미지로 만들고자 한 작가의 시도는 유교질서에 대한 저항뿐 아니라 부모님의 죽음이 가져올 두려움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작가의 공통된 주제는 <세 얼굴, 두 장소, 하나의 장치(Three Faces Two Places One Device)>(2014)로 일단락된다. 이 연작은 아버지, 어머니, 작가 본인의 세 얼굴, 죽음(묏자리)과 삶(거실)의 두 장소, 이 모두를 바라보는 카메라라고 하는 하나의 장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은 직사각형 나무 오브제에 각각의 얼굴과 장소의 사진을 붙이고 그것을 다시 동그랗게 파내거나(<구멍(Hole)> 파낸 것을 주고받거나(<배꼽(Button)> 뚫린 구멍 사이로 손을 맞잡거나(<탯줄(Cord)>) 구멍으로 손을 불쑥 내미는(<코(Nose)> 등의 특정 행동을 찍은 각각 4장으로 구성된 사진연작을 통해 부모와 자식, 삶과 죽음의 관계를 가볍게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와 같은 일관된 주제에 대한 천착은 사실상 그의 삶의 배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자수성가한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1남 2녀 외아들로 태어나 예술을 전공하며 겪어 온 삶의 갈등이 일견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개인적인 동기에 그치지 않고 가족관계와 유교문화 전반으로 주제를 보편화하고, 시선과 권력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진 매체의 고유한 본성을 탐구해왔다. 안진균의 사진을 단순히 실제를 기록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사진이 아닌 현대미술 안에서 특정한 매체를 사용하는 시도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먼저 영화의 장면들처럼 이어지는 연작에 대한 선호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정지된 사진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초기작 대부분에 등장하는 비디오카메라와 모니터는 이러한 특징에 대한 실마리가 된다. 이는 사진 이전에 영상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전반적인 작가의 작업이 사진 이미지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사진이 어디에 어떻게 놓이는가 하는 설치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사진을 배치할 특정 오브제나 구조물을 만드는 것은 물론, 시선의 문제에 일관된 관심을 가져온 작가는 작품 안에서의 시선뿐 아니라 관객의 시선까지도 연결된 것으로 보고 사진의 공간 내 배치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의 최근작들은 이러한 특징을 전반적으로 견지하되, 내용과 형식 상 일종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모님이 사라지고 아기가 등장했다. 부모님과 맺었던 관계를 이제 갓 태어난 본인의 자식과 다시 맺어야 하는 입장 변화를 계기로 작가는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를 절감하고 좀 더 보편적인 소재로 작업을 확장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 중심에는 부모와 자식, 삶과 죽음의 관계를 사진의 반사(reflection)와 닮음(resemble)의 속성에 비유하는 시도가 놓여있다. 본인 삶의 구체적인 계기를 타인과 사회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하는 것이 예술의 바람직한 하나의 방향이라고 할 때 안진균은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카메라를 들고 묵묵히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신혜영 |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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